Metaphor

박지혜, 아침

2017. 9. 23. 06:00

어슴푸레한 빛. 불 켜진 방은 환하다. 쓰레기차가 지나간다. 귀뚜라미 소리는 없다. 빗소리도 없다. 파도 소리 같은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그곳의 파도 소리를 녹음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후회는 쌓인다. 후회는 후회를 잊는다. 후회는 후회를 쌓는다. 새소리가 요란해진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마루에서 부엌까지 걸어가면서 메조스타카토의 적당한 길이를 생각했다. 적당은 없었지만 적당은 있었다. 물을 끓인다. 과테말라 21g. 눈물 날 정도로 맛있는 커피. 그와 나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안다는 듯 마주 보고 있었다. 착각과 거짓만이 유일한 희망 같기도 했다. 아니 그런 건 없다. 그럴 것이다. 오늘 쓴 문장 어디에도 아름다움은 없다는 너의 문장은 아름다울 것이다. 환해진다. 이젠 첼시 호텔을 들어도 별로 첼시 호텔에 가고 싶지 않다. 단지 어떤 감각들. 흐려지며 분명해지는 것들. 죽은 사람이 벚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는 봄에도 장갑을 꼈다. 장갑 낀 손으로 커피 잔을 들고 담배를 피우고 무언가를 적었다. 그를 기억한다. 물을 끓인다. 케냐 22g. 눈물 날 정도로 맛있는 커피. 안녕, 잠에서 나온다. 안녕, 잠으로 들어간다. 미명과 사양을 착각한다. 부서지는 웃음. 환하게 환하게. 선데이 모닝을 듣는다. 아침의 선물. 아침의 속도. 불안한 숨을 몰아쉬는 나의 숲. 이를 닦는 너의 숲. 우리들의 결정적인 숲. 우리들의 불가능한 숲. 이런 아침에 우리라는 단어를 고민하고 싶지 않다. 잠과 잠 밖에 해가 있다. 젖은 목소리를 말린다. 목소리 안의 목소리. 목소리 밖의 목소리. 목소리가 쌓인다. 벽면의 그림자가 어둠을 닫는다. 서쪽에는 그가 살고 있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그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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